2013/11/25

[단편] 절망의 오후

나는 지금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해있다.
두꺼운 책들과 어지러이 색인이 붙어있는 자료들과 원고지 뭉텅이들이 위태롭게, 그러나 나름의 규칙으로 산을 이루고 있던 책상 위는 마구 쏟아져 뒤엉켜 버렸고, 물건이 한번 들어가면 결코 나오는 일이 없던 서랍도 전부 뒤엎어져 작고 오래된 잡동사니들이 방바닥에 굴러다닌다. 누가 어디를 여행한 기념으로 사다 준 선물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저 향초는 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했는지는 묻지 마시라. 내 허락 없이 방을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날벌레 따위가 이런 짓을 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몇 시간 전부터 완전히 신용을 잃어버린 내 기억이 행여라도 맞다면, 내 고요한 작업실을 통제불능의 아수라장으로 만든 범인은 바로 나다. 물론 조금 전에는 홧김에 마구 욕설 섞인 소리를 지르며 아무 물건을 두어번 집어 던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분노조절장애 같은 병을 앓고 있을 거라는 의심은 거두어주기 바란다. 이건.. 그러니까 아주 이례적인, 일시적인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일어난.. 아니 그만두자. 지금 나에게 좋은 정신과 의사를 소개해 주려고 마음먹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당신의 호의는 일단 사양해 두기로 하자.
 
오늘 오전엔 무척 컨디션이 좋았다. 요 며칠 흐리던 날씨가 오늘따라 맑고, 겨울이 시작되면서 낮아진 해가 방 안 깊숙이까지 햇빛을 찔러넣어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모처럼 기분이 좋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작업실에 앉았고 꽤나 집중해서 평소보다 작업 진도를 많이 나간 참이었다.
, 나는 시시한 글을 끄적이는, 일종의 작가다. 지금까지 두 권의 책을 냈고,비정기적으로 잡지에 칼럼을 내기도 한다. 별로 유명하거나 잘 팔리는 편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업계에서 꽤 좋은 평이 늘어가는 중이다. 작가라고 이름 붙은 사람들에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나는 내 작업실 책상, 늘 쓰던 컴퓨터, 늘 쓰던 펜이 아니면 도저히 작업을 할 수 없는 약간의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 아니, 의사를 만나야 할 정도는 아니라니까? 어디까지나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초고를 작업할 때만큼은 꼭 노트에 만년필을 사용하는데, 그 만년필은 내가 작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이다.
학생시절 글을 쓰려고 일단 워드 프로그램을 켜고, 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써낸 몇 줄의 글이 너무나 허접해서 스스로에게 재능이 없음을 한탄하던 때였다. 아르바이트비를 모아 대범하게 질렀던 꽤 비싼 브랜드의 만년필을 손에 쥐고 생각했다. 나는 단지 겉멋으로 작가가 되려고 하는 건 아닐까. 너무나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우울한 생각을 잊으려 머리에 떠오르는 온갖 잡생각들을 아무렇게나 끄적이기 시작했고 짐작하다시피, 밤새도록 엄청난 집중력으로 써낸 그 낙서가 내 데뷔작의 초고가 되었다. 그 뒤로 내가 쓰는 모든 글이 그 만년필로 시작됨은 물론이다.
 
, 아까 점심을 먹고 다시 작업실로 돌아갔을 때 오전에 쓰던 만년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그 순간의 내 충격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당황했지만 침착했다. 워낙 많은 책들이 쌓여있는 곳이다 보니 어딘가로 굴러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좌우의 책 더미 아래에 손을 넣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에 덮여 안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노트 아래, 자료더미 옆, 연필꽂이 뒤쪽까지 있을법한 곳은 모두 살펴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나는 무척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책상 위를 섬세하게 더듬으며 그 길쭉하고 매끈한 물건을 추적했다. 있을법한 모든 장소에서 허탕을 치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렸다. 이제 이건 장난이 아니다. 있을법하지 않은 장소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하면서 어딘가 황당한 장소에서 그것이 발견되기를, 그래서 이게 하나의 우스운 해프닝으로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 오전 내내 분명 만년필을 사용했고,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얼마 전 자료 수집을 위해 만났던 분인데, 고맙게도 부탁드렸던 자료를 보내주셨다. 감사한 마음에 내 책이라도 보내드리려 주소를 여쭈었고 수첩에 받아 적었다. 그 메모도 만년필로 쓴 게 분명하. 전화를 끊고 기지개를 켠 다음 시계를 보니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이 참에 점심을 먹고 와서 다시 쓸 생각으로 외투를 입고 자주 가는 근처 식당에 가서 고등어조림을 먹었다. 식당에서 주는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근처를 산책하다가 한시쯤 작업실에 돌아왔다. 그럼.. 젠장, 만년필은 어디로 갔을까?
 

더 이상 뒤질 곳은 남아있지 않다. 나는 내 공간이 흐트러지는 것을 아주 싫어하지만 이미 이곳은 앉을 곳도 없을 만큼 엉망이 되었다. 엄격한 규칙에 따라 분류해 놓았던 책 더미들은 모두 한 데 뒤엉켰고, 머리카락 하나도 용납되지 않던 깔끔한 방바닥은 멍청한 잡동사니들에 점령당했다. 평소 같으면 이것만으로도 충분이 나를 미치게 만들 수 있지만 지금 나를 정서불안 괴물로 만들고 있는 건 이런 수라장이 되도록 찾아헤맨 만년필이 내게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 없을 리가 없는 만년필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완벽주의자인 줄 알았던 내가 실은 끔찍하게 부주의한 사람이었다는 것? 도난에 무방비한 이 작업실의 보안문제? 어쩌면 누군가 슬럼프를 겪고 있는 작가 지망생이 내 만년필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눈치 채고 계획적으로 빼돌린 것은 아닐까?
아아..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만년필이 없는데 무슨 수로 글을 쓴단 말인가. 어쩌면 만년필에 의존하여 글을 써 온 재능 없는 작가에게 내려진 마땅한 형벌일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지금까지의 내 기억이 모두 망상이고 만년필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건 아닐까. 나는 정말로 의사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다. 슬프고 절망스럽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Illustration by 개박하 with Gi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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